

57년 동안
흰 가운을 입고
국중모 약사
글 편집실 사진 백기광, 송인호, 윤선우
선진약국 *
중학교 진학도 어렵던 환경, 의사를 꿈꾸던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약사가 되었다. 흰 가운을 입고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며 57년의 시간을 보냈다. 밤중이나 휴일에도 아파서 약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문을 열고 약을 내어준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었던 소년은 어느덧 85세의 할아버지 약사가 되어 오늘도 선진약국의 문을 연다.


#의사가 되고 싶던 소년
“저 앞 빨간색 건물에서 1967년 약국 문을 열었어요. 3년 후 지금 자리에 2층 건물을 지었고요. 이 골목에서 57년째 약국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전라남도 담양이 고향인 국중모 약사는 어릴 적 꿈이 의사였다. 흰색 가운을 입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의사가 막연하게 멋있어 보였고, 가운입은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학교 4학년 때 6·25 전쟁을 겪은 탓에 중학교 진학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중학교에 간신히 진학한 상황. 의대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또래 친구들 역시 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고 농사일을 돕거나 집안일을 거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실적으로 의대 진학은 어렵다고 판단한 국중모 약사는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공군사관학교에 가려면 신체검사를 통과하고, 필기시험을 이틀 동안 봐야 하는데 첫날 시험 보는 도중에 배가 아프더라고요. 그래도 꾹 참고 시험을 보고 집에 왔죠. 다음 날도 시험을 보러가야 하는데 전날보다 배가 더 아프더니 턱까지 온몸이 부어올랐어요. 맹장염이 터져서 그렇게됐나 봐요. 그래도 아픈 걸 참고 시험장에 가려고 하다가 결국 병원으로 옮겨졌어요. 입원해서 수술받고 하면서 시험 보러 못 갔죠.”


#차선으로 선택한 약사의 길
원하던 의대 진학도, 공군사관학교의 꿈도 접어야만 했다. 그래도 아픈 사람을 돕고 싶다는 꿈은 접을 수가 없어 약대에 진학해 약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했고, ROTC 2기로 군생활도 하며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조선대 약대 7회 졸업생으로 약사시험에 합격한 국중모 약사는 남원의 한 보건소에서 6년간 약사로 근무하다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당시 한 제약회사와 같이하던 일이 있었고, 그 회사가 이 근처라 창전동에 자리 잡게 됐어요.” 연고도 없는 서울 서대문구 창전동 골목에 선진약국 간판을 달고 약국 운영을 시작했다. 보건소에 근무하면서 최신 처방집과 약 사진집 등을 구입해 틈틈이 공부도 했고, 6년간 조제하며 쌓은 노하우가 있어 어디서 약국을 개업해도 잘될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약사법 개정이 있기 전까지 국중모 약사의 선진약국은 문턱이 닳을 정도로 찾는 환자가 많았다. 한약사 자격을 취득해 아픈 증상에 따라 양약과 한약을 따로 또 같이 조제했는데, 금방 나았다는 사람들 덕분에 ‘약 잘 짓는 약국’으로 소문도 났다. 약사법 개정 후 병원 근처로 이사할 법도 한데 국중모 약사는 30년간 이 골목을 지키며 이웃들의 건강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야간과 휴일에도 문 열어주는 약국
“10시까지 약국 문을 열어두곤 했어요. 밤에 급하게 약국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집이 바로 옆에 있으니 그렇게 했어요. 지금은 8시 정도면 문을 닫지만 급하다고 문 두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또 나와요. 홍대 후문 근처라 학생들이 밤에 올 때도 있고, 우리 약국은 밤에도 문 두드리면 열어준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기도 하고요. 주말에도 찾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옵니다.”
근처에 병원이 없는 동네이다 보니 이젠 조제카드로 가득했던 약장 속은 텅 비어버렸고, 가끔 혈압약을 찾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일반의약품만이 약국을 채우고 있다. 약국을 시작할 때 한 제약회사에서 준 나무 의자와 알루미늄 문, 조제실에 빼곡하게 적힌 메모와 유리 약장이 선진약국을 지켜온 국중모 약사의 쌓인 이야기를 건넨다.
“얼마 전 뇌출혈로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약국 문은 열어야죠. 지금도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으면 너무 좋아요.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건강을 찾게 해주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