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이야기

107년, 3대째 이어져 내려온
사람을 이롭게 하는 약국

편집실 사진송인호 영상 김수현

활명당약국 조경래 약사*

올해로 107년째 한자리에서 3대가 가업을 이어 운영하는 약국이 있다.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과 서대문역 사이 길모퉁이에 있는 활명당약국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약을 지어 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약국’을 만들고자 한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손자인 조경래 약사에게 이어지며 활명당약국을 지켜 나가고 있다.

“이 약장은 할아버지가 쓰시던 거예요. 우리 약국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이지요. 서랍이 얕은 한약장이었는데 서랍 두 칸을 하나로 합쳐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요. 리모델링할 때 페인트칠만 했죠. 단단하게 잘 만들어진 약장이라 잘 쓰고 있습니다.”

1917년, 조경래 약사의 할아버지인 조용원(1892~1971) 씨가 현재의 자리에 활명당약방을 열었다. 그 후 아들 조영제(1921~2007) 씨가 이어받았고, 다시 손자인 조경래 약사가 물려받아 올해로 활명당약국은 107년이 됐다. 길모퉁이 3층 건물의 1층을 100년 넘게 지켜온 것이다.

조경래 약사의 할아버지 조용원 씨는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약학교를 졸업했다. 20대 중반에 고국으로 돌아와 악재를 판매하는 약종상 면허를 취득하고 약방을 차렸다. 한학자인 증조부가 아들에게 유망한 분야라고 생각되는 약학을 권했다고 한다. 약사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조제약을 팔진 못했고 일본인이 수입했거나 소규모 제약사가 개발한 양약을 주로 팔았는데, 하루 매출이 당시 쌀 두 가마 값에 달했다고 한다.

# 활명당약국의 시작

본격적인 활명당약국의 시작은 조영래 약사의 아버지인 조영제 씨가 경성약학전문학교(서울대 약대 전신)를 졸업하고 약사 면허를 취득, 1943년 약방이 정식 약국이 되면서부터다.

“아버님이 자체 개발한 약이 인기 있었다고 들었어요. 바셀린에 붕산을 혼합한 ‘두꺼비 고약’이 곪은 상처에 잘 듣는다고 많이들 찾으셨대요. 생후 100일쯤 된 갓난아기를 위한 기침약 ‘100일유(油)’도 개발하셨고요.”

67학번인 조경래 약사는 1971년 중앙대 약대를 졸업하고 24세에 아버지로부터 약국을 물려받았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진 약국을 많은 사촌 형제들 중에서 자신이 물려받게 돼 자랑스럽기도 했고, 가업을 잇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금고 비밀번호를 알려 주시며 ‘잘 부탁한다’고 하신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그렇게 시작한 약사 생활이 올해로 54년이 됐다. 일요일만 쉬고 일주일에 6일, 아침9시부터 밤 10시까지 약국 문을 열어 둔다.

“지금까지 약국을 성실하게 운영할 수 있는 건 가업을 잇는다는 사명감 때문이죠.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를 거쳐 저에게 내려온 약국을 잘 지키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대로라면 80까지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약국

긴 세월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니 오래전 다른 곳으로 이사나 이민을 간 사람들이 우연히 동네에 들렀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약국을 보면 무척이나 반가워한단다.

“외국으로 이민 간 분이 30~40년 만에 우연히 예전에 살던 동네를 지나가다가 우리 약국 간판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 들어오셨어요. 주변이 달라져서 낯선데 약국이 그대로 있어 너무 반갑다고 하더라고요. 옛날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놓고 가셨어요. 약국을 기억하고 들어와서 인사를 해 주는 분들을 만나면 저도 참 반갑지요.”

77년을 산 동네라 아는 사람도 많고 조경래 약사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도 많다. 근처 가게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서 택배가 오면 좀 받아 달라는 부탁도 하고, 인근 주민이 처방전 맡기고 갈테니 약 지어 놓으면 이따 찾아가겠다고도 한다.

“큰 병원 앞에 약국이 많지만 처방전을 들고 꼭 우리 약국에 오는 분들이 계세요. 처방전에 있는 약이 없어서 주문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맡겨 놓고 간다니까요. 오래전부터 다닌 약국이라 저한테 약을 지으면 안심이 되나 봅니다. 또 저한테 도움 되라고 그렇게 하는 분도 있어요.”

가족처럼 지낸 시간이 길어서일까. 불편하더라도 꼭 처방전을 갖고 찾아오는 주민들 덕분에 약국을 지킨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조제약보다는 일반 의약품 판매가 주를 이루지만, 약국 운영이 잘 됐을 때를 생각하며 명맥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한다.

“1970~80년대엔 약국 월수입이 집 한 채 값에 맞먹을 정도였어요. 의약 분업 이후 조제약은 병원 처방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손님이 많이 줄었죠. 또, 두 차례 도시 개발로 앞, 옆으로 길을 넓히면서 우리 약국도 면적이 많이 줄었고요.”

# 남을 이롭게 하는 약국

조경래 약사는 자신의 뒤를 이어 약국을 이어받을 자녀가 없어 아쉽긴 해도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해서 약학 공부를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자신이 약국 문을 닫으면 활명당약국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남은 세월 약국을 잘 지켜 나가겠다는 마음이다.

“할아버지는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약값을 받지 않으셨다고 해요. 남을 이롭게 하는 약국이 돼야 한다고 하시면서요. 그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며 약국을 운영해 왔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활명당약국이 문을 닫는 그날까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약국으로 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