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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도시, 변하는 삶
리퀴드폴리탄의 시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생활 인구가 특정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보다 찾는 사람들에 의해 새롭고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는 것이다. 지금은 액체처럼 흐르고 스며들어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리퀴드폴리탄의 시대다.

구승준 칼럼니스트·번역가

제나라 사신 안영이 초나라에 갔을 때였다. 초나라 왕은 초나라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제나라 사람을 끌고 와 “제나라 사람들은 도둑질을 잘하나 보구나”와 같은 말로 안영을 능욕하려고 했다. 이에 안영은 “같은 귤나무지만 귤나무가 회수 북쪽에서 자라면 탱자가 됩니다. 초나라의 풍토 때문에 제나라 사람이 도둑이 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사는 곳보다 그 사람이 보는 유튜브 목록이 더 중요한 시대지만, 고대에서부터 가까운 현대까지는 안영의 말마따나 자신이 사는 곳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히포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서양 학자는 물론 맹자와 순자도 환경결정론에 근거한 주장을 펼쳤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삶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오죽하면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이동하는 것을 액운으로 보고 ‘역마살’이란 이름을 붙였겠는가.

유동 인구가 만드는 새로운 문화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 지방에서 서울로 폭발적인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1960년의 서울 인구는 244만 명이었는데, 1980년이 되자 835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 밖에 도시 간의 인구 이동도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지금은 어떤 지역에 거주하는 ‘정주 인구’가 아니라 ‘생활 인구’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대전에서 서울에 오려면 ‘비둘기호’로 네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2024년에는 KTX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2020년 기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서 일하는 인구 중 약 50%가 서울 외부에서 출퇴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역 인구의 이동성이 높아지면서 특정 지역에서 1박 이상 체류하는 인구, 지역과 관계를 지닌 외부인을 뜻하는 ‘관계 인구’가 생겨났다. 관계 인구는 도시에서 거주하다가 자신의 고향으로 귀향한 U턴, 도시 출신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I턴, 지방 출신 도시 거주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J턴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관계 인구와 함께 ‘생활 인구’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일산에 살지만 압구정동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압구정동에 살지만 경기도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 지역 문화는 단순히 그 지역에서 잠을자는 ‘정주 인구’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만들어간다.

최근, 도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마치 액체가 흘러들 듯 들어와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 되었다. 이를 두고 등장한 용어가 ‘리퀴드폴리탄(Liquidpolitan)’이다.

액체처럼 서로 스며들어 흐른다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적 자본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불러서 모으고 다양한 사람들의 시너지가 흘러넘치는 도시의 유연한 변화를 ‘리퀴드폴리탄(Liquidpolitan)’이라고 정의했다. 리퀴드(liquid)는 액체고, 폴리탄(politan)은 도시를 말한다. 현대의 도시와 지역이 액체처럼 유연하게 서로 연결되며 다양한 변화를 겪는 가변체라는 점을 강조한 개념이다.

이를테면 강원도 양양은 2015년 이전까지만 해도 강릉이나 속초를 찾는 사람들이 강원도에 온 김에 들리는 곳에 불과했다. 속초나 강릉에는 연간 약 1,0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왔지만 양양은 100만 명 이하만 찾았다. 그러나 2015년 하조대해수욕장 북쪽에 서퍼 비치가 조성되자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현재는 40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전국의 서핑 인구 45%가 양양에 오고, 서핑 스쿨 40%가 양양 지역에 몰려 있다. 이와 함께 지역 문화도 바뀌었다. 원래 이곳 전통 시장에서는 말린 해산물 등을 팔았지만, 지금은 수제 치즈나 수제 캐러멜, 와인 등 훨씬 더 다양한 품목을 취급한다.

성수동은 최근 서울에서 가장 ‘힙’한 곳이 되었다. 원래 수제 구두 공장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에서 생산된 값싼 구두가 국내 시장에 대거 유입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폐업의 수순을 밟았다. 성수동의 빈 공간들은 서울의 중심 지역에 있으면서도 임대료가 저렴한 까닭에 스튜디오나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장과 창고는 독특한 인더스트리얼 분위기를 자아내 예술 창작과 실험적 작업에 적합했다. 디자인, 미술 등 창작 분야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성수동만의 분위기를 만들었고, 기업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성수동에 ‘시그니처 스토어’를 속속 열기 시작했다. 성수동에 방문하면 ‘온더스팟’이나 ‘르 라보’ ‘이케아’ ‘아디다스’ 등에서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울의 익선동, 창신동, 연남동도 변화했다. 충청남도 공주시의 제민천 일대도 창의적인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밖에도 액체처럼 스며든 사람들은 제주 탑동, 인천 개항로, 군산, 순천 등을 바꾸어 놓았다.

인구 유동성의 긍정적인 면모

리퀴드폴리탄 현상이 가속화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소비자들의 소비 형태가 경험 위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인스타 성지’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유연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직장이 위치한 지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지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도로의 정비와 교통망의 변화 또한 무시 못 할 요인이다.

리퀴드폴리탄이란 개념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2000년대에 주창한 ‘리퀴드 모더니티(Liquid Modernity)’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현대 사회가 과거의 산업사회와는 다르게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현대 사회는 지역의 경계가 모호하며, 특정 지역에 살지만 이미 글로벌 사회에서 살아가는 듯한 양태를 보인다고 했다. 리퀴드 모더니티 사회에서 개인은 매우 불안한 존재다.

그러나 리퀴드폴리탄의 관점에서는 이런 유동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관계 인구가 유연하게 지역을 넘나들며 지역의 정체성과 생활 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현상에 초점을 둔다. 도시는 고체가 아니라 액체와 같아서 콘텐츠가 강물처럼 흐르고 서로 교류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관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내가 사는 곳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모르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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