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효를 유지하는
올바른 약 보관법
대부분의 가정에는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둔 상비약, 병원에서 처방받아 와서 먹고 바르다가 남은 약 등 다양한 약이 있습니다. 약은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하는 법인데 이에 대해 잘 몰라 방치해 둔 약들도 꽤 있을 겁니다. 약의 올바른 보관법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글 정희진 울산대학교병원 약제팀 약사
약, 보관과 관리가 중요
약은 인체 기능에 영향을 주며 효과를 발휘합니다. 약이 변질되면 원하는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반대로 과하게 효과가 나타나며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약이 변질되지 않도록 올바른 방법으로 보관해야 합니다.
약을 개발하고 사용 허가를 받으려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 중 약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부분도 있습니다. 많은 실험을 거쳐 약 보관 장소의 적정 온도, 습도, 유통기한, 포장지를 뜯은 후 사용 가능 기간을 정하죠. 이 내용은 약 포장 용기나 설명서에 적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약들을 떠올려 봅시다. 동그랗고 건조한 알약, 매끈한 젤리처럼 보이는 캡슐, 투명한 시럽, 끈적이고 불투명한 시럽 등 약 자체의 모양이나 재질도 가지각색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포장도 다양합니다. 어떤 약은 흰 플라스틱 통이나 갈색 유리병에 수십 알이 한꺼번에 들어 있고, 어떤 약은 은박 판에 한 알씩 낱개 포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물약 중에서도 원래 액체인 약도 있는가 하면, 가루를 물에 녹여 시럽으로 만들어야 하는 약도 있습니다. 이렇게 약 형태와 포장이 서로 다른 것은 각 약의 물리·화학적 특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환경에 반응하는 약
빛과 열기, 습기에 약한 약도 있습니다. 약은 부적절한 환경에 노출되면 성분이 변하거나 침전물이 생기기도 하고, 맛이 너무 써져서 먹기 힘들어지거나, 효과가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음식으로 한번 생각해 볼까요? 대부분의 음식은 냉장고에 넣고 두고두고 먹습니다. 온도가 낮을수록 신선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개는 그렇지만 냉장고에 넣으면 오히려 빨리 썩거나 맛이 변하는 식품도 있습니다. 고구마는 냉장고에 두면 냉해를 입어 빨리 상하고, 감자는 성분이 변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구마와 감자를 냉장고에 며칠 둔다고 해서 바로 겉모습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관 방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변화를 직접 체감하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효가 없어져서 ‘약’이 아니라 그저 전분 덩어리나 달달한 액체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약은 건조한 곳에 보관
약이 변질되는 원인 중 빛, 산소, 습기, 미생물이 가장 흔한 원인입니다. 물론, 모든 약이 이 모든 경우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약은 습기에는 약하지만 빛에는 강할 수도 있습니다.
빛에 약한 약은 불투명하게 만들거나 차광 재질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을 때 수액 병이나 수액 팩이 알루미늄 포일로 감싸져 있거나, 노란색 혹은 갈색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면 그 수액에는 빛에 약한 성분이 들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또, 빛을 받으면 온도가 높아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열기에 약한 약은 냉장고에 보관하는 게 우선이기는 하나 빛이 없는 곳에 두는 것도 중요합니다.
습기에 약한 약은 습기 때문에 녹거나 뭉칠 수 있습니다. 약 자체는 습기에 변질되지 않는 경우라도 습한 환경에 노출되면 균이 번식하기 쉬워 약이 균 덩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약은 건조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땅한 곳이 없으면 약을 지퍼 백에 넣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원래의 포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
비타민은 특히나 온도, 산소, 빛에 약해 쉽게 분자 구조가 변하며 효과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비타민 중에서는 은색 판에 낱개로 포장된 것이 많습니다. 이를 PTP(press through pack)라고 하는데, 한 알씩 톡톡 누르면 포일을 뚫고 약이 튀어나오죠. 이 포장법은 습기와 빛을 모두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어 습기나 빛에 쉽게 변하는 약에 주로 쓰입니다.
그런데 매번 포장에서 빼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PTP 포장을 벗겨서 다른 약들과 함께 한꺼번에 약포지에 넣어 달라고 요청을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약포지는 겉보기에 비닐처럼 생겼지만, 방수도 차광도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PTP 포장을 벗겨 안에 든 약을 약포지나 병에 옮기면 약이 변질되기 쉽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약은 그 특성에 맞게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의 포장 상태 그대로 두고, 복용 직전에 개봉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복용 전 한 번 더 확인
같은 질병이나 증상에 사용하는 약이라 해도 성분에 따라 보관 방법이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약 사용에 주의할 점이 많은데 약별로 모두 다른 환경에 따로 보관하기는 힘들 테지요. 그래서 가장 많은 약에 적용되는 보관 조건인 ‘빛이 없고 건조한 상온’에 약을 두라고 주로 안내하고, 여름이라 온도가 높고 습해진 경우나 냉장 보관해야 하는 경우는 따로 더 자세히 안내합니다.
‘빛이 없고 건조한 상온’을 숫자로 나타내자면 습도 60% 미만에 25℃ 이하입니다. 차가운 곳에 둘수록 신선할 것이라며 냉장고에 두는 경우가 있는데, 냉장고 안에는 습기가 많아 약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물론 냉장 보관해야 하는 약도 있습니다. 몇몇 안약, 인슐린 주사, 항생제 시럽 등이죠. 이 약들은 제약 회사에서 생산될 때부터 사용할 때까지 냉장 보관하라는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약마다 권장되는 곳에 보관한다면 사용기한 끝까지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병원이나 약국 등 보관 조건에 맞게 철저히 관리하는 곳에서도 약이 변질되는 경우가 간혹 생깁니다. 깨져 있거나, 색이 변했거나, 시럽인데 뭉쳐 버린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약사들도 모든 약 하나하나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조제합니다. 그러니 집에서 주의 사항을 지켜 약을 잘 보관하셨다 하더라도, 사용하시기 전에 상태가 괜찮은지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