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너무 행복한 일’
한독약국
전상훈 약사*
한독약국이 서울 종로구의 대학로에서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자리 잡은 지도 어느덧 52년째다. 올해 82세인 전상훈 약사는 아침 8시 반에 문을 열고 저녁 8시 반에 약국 불을 끄고 2층 살림집으로 올라간다. 52년째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그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글 편집실 사진 송인호 영상 김수현
한독약국 전상훈 약사의 하루는 아침 5시부터 시작된다. 전 약사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테니스를 치러 가기 위해 5시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운동복을 입은 후 5시 반이면 집을 나선다. 6시 삼청공원에 도착하면 함께 테니스를 즐기는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한 시간 가량 그들과 어울려 테니스를 치고 틈나는 대로 걷는 것이 그의 건강 유지 비결이기도 하다.
“1975년 약국을 개업했을 당시, 약국 앞쪽에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 안에 테니스장이 있었고, 또 옆에 있는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안에도 테니스장이 있었어요. 따로 레슨을 받지는 않고 혼자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죠. 주변에서 잘 친다고 해주니 재미가 더 붙었고요. 그때 시작한 테니스를 지금도 치고 있습니다. 시니어 테니스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지요. 테니스를 칠 때면 너무 행복해요.”
중앙대학교 약학 대학을 졸업하고 한독약품에 다니던 전 약사가 약국을 개업하게 된 것은 성균관대학교 약학 대학을 졸업하고 약국을 개업한 제부 덕분이다. 지금 한독약국 자리의 건너편에서 약국을 개업해 2년 정도 운영하던 제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전 약사에게 넘겨준 것이다. 전 약사는 다니던 회사의 이름을 따 한독약국이라 이름 짓고 그 자리에서 몇 년을 더 운영하다 지금의 약국 자리로 옮겼다.
#강원도 양양이 고향인 10남매의 장남
“강원도 양양이 제 고향이에요. 양양에서 제법 큰 양복점을 운영하셨던 부모님이 아들 다섯, 딸 다섯, 이렇게 10남매를 낳으셨고, 제가 장남입니다. 양복점을 하시면서 자식 열 명을 다 대학 공부까지 시켰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양에서 나고 자란 전상훈 약사는 약학 대학에 가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 살던 동네에 약국이 딱 하나 있었는데, 약국에서 약을 짓는 약사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약사를 보며 약학 대학 진학을 꿈꾸게 됐고, 중앙대학교 약학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제약 회사에 취직했고, 고향에 있는 동생들 몇몇이 서울로 올라와 같이 살면서 약국도 개업하고 바쁘게 살다 보니 서른 셋, 당시로는 노총각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대부분 서른 살 이전에 다 결혼을 하던 시절이니 서른셋이면 늦었다고 할 때였죠. 주변에서 얼른 결혼하라고 성화였어요. 당시 혜화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를 소개받아 결혼하고 연년생으로 아들 둘을 낳았고, 그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아주 행복한 일이지요.”
동숭동 일대가 대학로로 개발되면서 동네는 상업 시설이 들어서며 날로 발전을 거듭했고, 한독약국도 더 바빠졌다. 일대에 약국이 하나밖에 없던 터라 동네 주민은 물론 오가는 행인이 부쩍 늘면서 약국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감기약, 소화제, 피부약 등과 한약을 함께 조제하며 ‘약 잘 짓는 약국’이라는 소문도 났다. 오래전 동네를 떠난 사람들이 가끔 지나다가 약국 문을 열고는 ‘지금도 약국을 하시냐, 정말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 올 때도 전 약사는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볕 잘 드는 곳에서 독서 삼매경
여행을 좋아하는 전상훈 약사는 가끔 약국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약국 문을 연다. 연극배우들이 목을 보호해 주는 약을 사러 들르고, 대학로를 찾는 사람들이 감기약이나 밴드, 박카스 등을 사러 약국을 찾는다고 한다. 그렇게 오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인사를 나누는 시간도 전 약사에게는 ‘너무 좋고 행복한 일’이다.
전 약사가 꼽는 또 다른 행복한 일은 약국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다. 책을 읽다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있으면 노트에 적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책 옆에 써 두기도 한다. 놓치고 싶지 않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는 접어 두었다가 때때로 펼쳐서 다시 음미하기도 한다.
“약국이 남향이다 보니 오전 11시쯤 되면 해가 약국 안까지 들어옵니다. 그럴 때면 약국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이렇게 의자를 꺼내 앉아 책을 읽어요. 최근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이 참 마음에 남아 페이지를 접어 두었습니다.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라는 시입니다.”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 인내를 가져라. /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수 없으니까. / 중요한 건 /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테니까.
전 약사는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의 글을 읽으면 수도자의 맑은 마음이 느껴져서 좋고, 성경을 읽으면 삶의 해답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좋을 글을 읽고 마음에 새기다 보니 매일 매순간이 행복하다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그다.
“85세까지는 약국을 해야죠. 그다음에는 책도 더 많이 읽고 여행도 다니면서 지내고 싶어요. 매일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은 일도 없어요.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