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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검사로 암을 잡아내는
액체 생검 시대

피 검사로 암을 진단할 수 있는 시대다. 피 한 방울로 몸 안의 모든 암을 진단하고 암의 진행 정도, 암세포의 유전적 특징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피 검사로 암을 조기 검진하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김철중 조선일보 의학전문기자, 영상의학과 전문의

50세 유방암 환자 A씨는 지난해 겨울 서울의 한 대형 병원에서 유방암 1기 진단 후 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았다. 초기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 발견이 어렵다는 유방암을 빨리 찾은 비결은 가족력 때문에 참여한 임상 시험 덕분이었다. 자매가 유방암에 걸린 뒤 유방암 발병을 걱정하게 된 A씨는 혈액 속에 떠다니는 암 조각 유전자를 찾아내 조기암을 진단하는 임상 시험에 참여했다. 임상 시험에서 유방암 위험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자 서둘러 병원을 찾아 정밀 검진을 받았던 것이다.

혈액으로 암 진단, 액체 생검

A씨가 참여한 임상 시험은 ‘액체 생검(Liquid Biopsy)’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진단 기술이다. 이제 임상 단계를 넘어 최근 국내에서도 상용화된 이 기술은 소량의 혈액만으로도 다양한 암을 한 번에 진단할 수 있고, 암의 진행 과정이나 치료 효과까지 확인할 수 있어 암 진단의 신기원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매사추세츠공대(MIT)는 액체 생검을 ‘10대 미래 유망 기술’ 중 하나로 꼽았다.

지금까지는 몸속 어딘가에 있는 암을 발견하려면 내시경을 하거나 컴퓨터 단층 촬영(CT)를 찍었다. 대장암을 찾으려면 내시경을 받아야 하고, 폐암을 발견하려면 CT 촬영대에 누워야 했다. 암 조기 발견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흔히 하는 혈액 검사로 암을 진단할 수는 없을까? 이 상상 속 이야기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혈액에 떠다니는 암세포 유전자 조각을 찾아내 분석하는 액체 생검이 개발된 덕분이다.

혈액 속에 떠다니는 암세포 유전자 조각을 ‘순환종양 DNA’, 영어로는 ‘ctDNA’라고 부르는데, 이 조각은 암 종양에서 떨어져 나와 혈액 속을 돌아다니기에 피 검사의 혈액 샘플에서 검출된다. 혈액 샘플로 종양 유전자 변이를 감지하고 암 진단을 유추하는 이러한 진단법이 바로 액체 생검이다. 암 진단을 위한 병리 조직 검사에 빗대어 액체 검사로 암을 진단한다는 의미다. 액체 생검은 혈액뿐만 아니라 소변, 뇌척수액 등 다양한 체액을 이용한다.

혈액 속 암세포 유전자 조각 ctDNA는 암세포가 파괴되어 혈액 내에 방출한 유전자 단서다. 암 치료 후에는 ctDNA의 양이 감소하거나 유전자 변이 패턴이 변경될 수 있기에 이를 통해 치료가 잘되는지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

암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내비게이션

액체 생검은 암 진단과 치료 효과 감시 분야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암 종양에서 파생된 DNA 또는 단백질은 암의 행태를 확인할 단서다. 암세포가 암을 일으킨 유전적인 변이 물질을 피로 흘리기 때문이다. 암이 범죄자라면 액체 생검은 범인의 지문이나 머리카락을 찾는 과학 수사와 같아 암의 존재뿐만 아니라 진행 과정, 암세포의 유전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액체 생검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환자에게 간단한 채혈을 하고 혈액 샘플을 얻는다. 수집된 혈액 샘플은 종양 유래 물질을 분리 및 분석하기 위해 실험실에서 처리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기술이 사용되는데, 우선 중합 효소 연쇄 반응(PCR)이 있다. PCR은 암 돌연변이와 관련된 특정 DNA 서열을 증폭한다. 예를 들어 한 개의 조작을 천 개의 조각으로 증폭하는 식이다. 그래야 검사가 정확하다.

그 다음은 유전자 분석이다. 차세대 염기 서열 분석(NGS)을 이용한다. NGS는 암 종양의 광범위한 유전적 변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어 ctDNA 정체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단백질 분석도 이뤄진다. 혈액 내 특정 암 관련 단백질은 암 행태를 알아보는 바이오 마커로 활용되며, 이를 통해 암의 진행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액체 생검은 암의 존재, 암의 단계, 유전자 돌연변이 및 기타 관련 정보를 알려준다. 암 전문의는 이를 암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내비게이션으로 사용한다.

다양한 암종에 적용 가능

최근 액체 생검을 통해 유방암, 대장암, 폐암, 췌장암 등 거의 모든 암 진단이 가능해지고 있다. 유방암의 경우, 액체 생검이 진단 및 치료 후 효과 평가에 쓰인다. 유방암은 각종 여성 호르몬 수용체가 양성이나 음성이냐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달라지고 예후도 다르다. 이에 액체 생검으로 대표적인 여성 호르몬 수용체인 HER2 양성을 찾아내고, HER2 양성 ctDNA를 검출하여 치료 효과를 평가한다. 액체 생검은 유방암 재발 모니터링에도 쓰인다. 유방암 수술 또는 방사선 치료 후 혈액 샘플을 가지고 ctDNA 검사를 수행, 이 수치가 얼마나 올라가는지를 보고 재발 여부를 조기에 감지한다. 재발하더라도 조기 발견 및 치료가 가능하여 생존율이 높아진다.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흔한 백혈병 형태로 이 또한 혈액 샘플을 통한 액체 생검으로 진단 가능하다. 림프구 세포의 특정 표면 항원(CD19, CD5 등)을 검출하여 진단하며 면역계에 생기는 암인 림프종 진단에 유용하다. 진단 시 림프종 종류를 식별하고 치료 후에는 림프종의 상태를 모니터링한다. 췌장암도 ctDNA 검사를 통해 종양 유전자 변이를 감지하고, 치료 후 종양 부하를 추적하여 치료 효과를 평가할 수 있다. 대장암은 수술 또는 항암 요법 후 혈액 샘플로 ctDNA 검사를 수행하여 암 재발 여부와 치료 효과를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액체 생검을 통한 암 진단 및 치료 후 모니터링은 혈액 검사로 이루어져 신속하고 간단하다는 등의 장점을 무기로 암 종양의 유전자 변이 및 세포 상태를 비교적 빨리 평가할 수 있는 도구로 자리 잡았다. 혈액 또는 체액에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유전자 또는 항원을 검출하여 전염병을 조기 진단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있다. 액체 생검 기술의 발달로 언젠가는 피 검사로만 암 조기 검진이 가능한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조선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