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20세기의 발명

노벨평화상 후보로 31번이나 추천받았던 여성이 있다. 100년 전 "피임은 여성이 자유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자 인간 평등을 위한 첫걸음이다. 더 나아가 인간 해방을 향한 첫걸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다. 그는 '산아 제한(birth control)'과 '피임(contraception)'을 교육하며
여성의 권리를 높였고, 과학의 힘을 빌려 최초의 경구 피임약 '에노비드'의 개발을 이끌었다. 1920년 출간된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Woman and the New Race): 피임할 권리와 여성 해방의 시작』이라는
생어의 대표작이 2023년 우리나라에 완역본으로 출간되었다.
글 김효진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약제팀장
최초의 경구 피임약,
세상을 바꾼 에노비드
1960년 5월 9일, 미국 FDA에서 최초의 경구 피임약 ‘에노비드Ⓡ(Enovid)’를 ‘피임약’으로 정식 승인한 날로 2025년 5월 65주년을 맞았다. 에노비드는 에스트로겐 성분인 메스트라놀[Mestranol, Ethinylestradiol의 전구체(prodrug)]과 합성 프로게스테론인 프로게스틴 성분 노르에티노드렐(Norethynodrel)의 복합 경구피임약(Combined Oral Contraceptives, COCs)으로 개발되었다.
에노비드는 앞서 1957년 생리불순 치료제로 FDA 승인을 받았다. 낙태 금지는 물론, 콘돔을 사용하거나 피임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위법으로 규정했던 콤스톡법(콤스톡이 제안하여 1873년 연방법으로 통과된 풍속 교란 방지법)과 충돌을 막기 위함이었다. 경구 피임약이 개발되면서 성과 출산은 분리되었고,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서둘러 결혼하거나 임신으로 학업이나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1965년 미연방대법원이 마침내 피임을 인정하며 ‘임신하지 않을 권리’, 피임권이 인정되고 이후 미국 모든 주에서 피임약이 합법화됐다. 현재 피임 방법으로는 복합 경구 피임약, 자궁 내 장치, 피하 이식제, 콘돔, 난관 결찰술, 정관 절제술, 응급 피임 등이 있다.
사전 피임을 위한 '복합 경구 피임약'
사전 피임약은 성관계 전에 복용하여 인위적으로 임신 가능성을 낮추는 약물이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두 가지 성호르몬을 함유하여 월경 주기와 배란 주기를 조절한다. 피임 외에도 생리 불순이나 생리통 완화, 생리 전 증후군 개선, 생리 주기 조절, 여드름 치료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피임약의 작용 기전은 다음과 같다. 매일 같은 시간 피임약 복용으로 두 가지 성호르몬의 혈중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여 1) 배란 억제 - 시상하부와 뇌하수체에 작용, 난포자극호르몬(FSH)과 황체형성호르몬(LH) 분비 억제를 통해 배란을 방지하여 피임을 가능케 한다. 만일 배란이 일어나도 2) 수정 예방 – 자궁 경관 점액을 끈끈하게 만들어 정자의 통과를 어렵게 하고, 난관의 운동성에 영향을 주어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과정을 방해하고, 3) 착상 예방 – 자궁 내막의 위축을 유발해 포배(수정란)의 착상을 막는다.
처음 복용할 때에는 월경 주기 첫날부터 복용을 시작하고, 월경 주기 중간에 복용을 시작하는 경우 첫 7일 동안은 콘돔 등 추가적인 피임 방법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 약에 따라 21알이 들어 있는 약은 매달 21일 복용 후 7일 휴약하고, 28알 들어 있는 약은 포장에 적혀 있는 복용 순서에 따라 28일 동안 중단없이 가급적 매일 같은 시간에 복용한다. 복용 방법을 잘 준수하여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안정적인 피임 효과를 유지할 수 있다.
복용을 잊은 경우, 복용 예정 시간으로부터 12시간이 경과하지 않았다면 피임 효과는 유지된다. 생각난 즉시 1정을 복용하고 정해진 시간에 다음 정제를 복용한다. 복용 예정 시간에서 12시간이 경과한 경우 피임 효과가 감소될 수 있으므로 콘돔과 같은 격막 피임법을 병행해야 한다.
복합 호르몬 경구 피임약은 효과가 좋고 접근이 쉬우며 피임 외에 월경 이상 증상을 개선하거나 난소암, 자궁 내막암 발생도 감소시키는 등 장점이 많은 반면, 35세 이상으로 1일 15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 혈전 색전증 및 고위험군, 심혈관 질환, 수축기 혈압 160mmHg 이상 또는 이완기 혈압 100mmHg 이상, 혈관 질환으로 인한 고혈압, 전조 증상을 수반하는 편두통, 현재 유방암, 출산 후 21일 미만, 심한 간 질환 등에 복용을 금지하므로 상태에 따라 프로게스틴만 함유하는 약이나 다른 피임법을 사용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
경구 피임약의 이상 반응은 유방통, 편두통, 구역·구토, 혈전 생성 같은 에스트로겐성 부작용과 여드름, 체중 증가, 다모와 같은 안드로겐성 부작용이 대표적이다. 에스트로겐(Ethinylestradiol, EE)의 용량에 따라 고용량, 저용량(0.03mg), 초저용량(0.02mg)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고용량은 구토와 정맥 혈전색전증의 위험성이 높아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비교적 에스트로겐 함량이 높은 저용량은 두통, 유방통 가능성이 있으나 부정 출혈이 적은 장점이 있고, 초저용량은 부정 출혈 발생이 빈번할 수 있으나 오심, 두통 등의 부작용이 덜하다.
프로게스틴 성분에 따라 1~4세대로 구분
프로게스틴이 시장에 출시된 시기에 따라 1~4세대로도 분류한다. 2세대는 일반 의약품인 미니보라Ⓡ 등 2세대 레보노르게스트렐(Levonorgestrel) 제제고, 3세대는 마이보라Ⓡ(EE 0.03mg), 멜리안Ⓡ(EE 0.02mg) 등 게스토덴(Gestodene) 제제, 머시론Ⓡ 등 데소게스트렐(Desogestrel) 제제가 해당한다. 4세대는 전문 의약품인 야스민Ⓡ, 야즈Ⓡ, 클래라Ⓡ 등 드로스피레논(Drospirenone) 제제가 현재 시판되고 있다.
2세대 프로게스틴 레보노르게스트렐은 남성 호르몬인 안드로겐과 구조가 유사하여 여드름 및 다모증 부작용 가능성이 있으나 혈전 발생 위험은 낮다. 게스토덴 또는 데소게스트렐을 함유하는 3세대 경구 피임약은 2세대 안드로겐성 부작용이 비교적 개선되었으나 부종 및 혈전 발생 가능성이 있고, 4세대 드로스피레논 제제는 여드름, 다모증 및 부종 발생이 낮으나 혈전 발생 위험도가 비교적 높아 주의가 필요하다. 2세대 피임약에 사용되는 레보노르게스트렐은 응급 피임약(사후 피임약)과 자궁 내 장치(IUD)의 주성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사전피임약은 시중에 주로 3세대 제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게스토덴을 함유한 피임약은 두통, 신경과민, 부종 등 피임약 복용자들이 빈번하게 겪는 부작용 발생률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스토덴은 낮은 용량으로도 배란 억제 효과를 나타내기에, 피임약 복용이 처음이거나 평소에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다양해지는 피임약 선택지
레보노르게스트렐 방출 자궁 내 장치
(Levonorgestrel releasing intrauterine device, LNG-IUD)
LNG-IUD는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프로게스틴을 분비하는 피임 장치를 자궁 내에 삽입하는 기술이다. 치료 목적으로는 급여 기술로 등재되어 있으나, 본인이 원하여 피임을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비급여로 적용하고 있다.
임플라논 엔엑스티Ⓡ 이식제
(IMPLANON NXT Implant for subdermal use)
한 개의 임플란트를 팔 상박 안쪽 피하에 삽입하는 피임법으로, 한 번 이식으로 3년간 피임 효과가 지속된다. 프로게스틴 제제로 데소게스트렐의 활성 대사체인 에토노게스트렐(etonogestrel) 68mg이 들어 있다.
사후 피임약(응급 피임약)
사후 피임약은 성관계 이후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약으로, 관계 후 최대한 빨리(12시간 이내 권장) 복용해야 하기에 응급 피임약이라 부른다. 1999년 미국에서 사후 피임약 플랜 BⓇ(Plan B)가 최초 출시된 이후로 사후 피임약을 쉽게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 처방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사단체, 약 자체를 죄악시하는 종교 단체 등 입장이 서로 달라 종종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위해 주체적인 피임법을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1960년 최초의 경구 피임약이 세상에 등장했다. 당시 피임약은 혁신 그 자체였다. 지금은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피임약이 개발되고 IUD 장기 피임 방법 등 선택지가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피임약의 선택은 사용자의 상황과 선호도, 장단점과 금기 등을 고려하여 의약 전문가와 함께 선택하기를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