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의 길
지역사회를 지키는 일
도원약국
이병섭 약사*
44년이란 긴 시간 속에는 지역의 정서와 기억이 간직되어 있다. 1981년 문을 연 도원약국은 도내시장에서 시작해 서석동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약국을 찾는 사람들에게 꼭 맞는 약을 지어주며 그들의 건강을 지켜온 시간이 모두에게 따뜻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글 편집실 사진 백기광, 송인호, 윤선우
영상 김수현
# 의대와 약대, 인생의 방향성
광주광역시 서석동 도원약국의 이병섭 약사는 1981년 광주 민주화운동 직후, 도내시장에서 약국을 열었다. 조선대학교 약대로의 진학은 여정은 단순히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변화시킨 결정이었다.
“저는 원래 문과였는데, 사촌 누나가 약대를 권했고, 저 역시 내 삶을 일구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약대를 선택했습니다. 예비고사 성적이 좋아서 의대 진학도 고려했는데, 의대는 개업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경제적 부담도 컸어요. 약대 졸업 후 서울에서 관리 약사로 일하며 약사로서의 입지와 인생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약대 선택이 곧 삶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시작이었다고 회고한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것도 이 길을 걷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만약 문과대로 진학해 교사나 법조인이 됐다면 시력 문제로 오래 일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공간의 기억과 지역 속 약국의 역할
이병섭 약사는 1981년 도내시장에서 시작한 약국을 사회적 변화에 맞춰 유동적으로 운영해왔다. “처음엔 시장 골목 20m 안쪽에서 시작했어요. 의약분업이 본격 시행된 2000년대 초, 병원 옆으로 옮기게 됐죠. 과거에는 동네 토박이와 단골 손님이 많았지요. 돈을 빌리러 오는 이웃도,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주민도 모두 가족 같았습니다.”
도시 개발과 원룸촌 조성 등으로 동네의 모습은 변했지만, 그는 ‘약국은 여전히 주민 곁에 남아있는 사회적 공간’임을 강조했다.
“이제는 토박이 어르신들이 거의 안 계세요. 한 집에 서너 가구씩 살던 마을이 달라졌고, 옛 단골도 모두 떠났지요. 하지만 나그네에게도, 새로운 이웃에게도 약국은 항상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전문성의 뿌리와 약사로서의 보람
의약분업이 시행되기 전에는 감기약, 관절염약, 간장약 등 다양한 약을 조제하며 동료 약사들과의 지식 교류에 힘썼다. 지역의 약사들과 주 2회 이상 모여 한약, 양약, 제3의학에 대해 공부했다.
약사회에서 총무와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함께 이어갔다. 이병섭 약사는 약사라는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을 ‘정년이 없고, 평생 현장에서 환자와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찾는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환자를 옆에서 지켜주며 상담과 복약지도를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겐 큰 힘이 됩니다. 나이 들어 은퇴하면 공허해하는 경우도 많이 보는데, 저는 계속 약국에서 사람과 부대끼면서 삶의 활력을 얻고 있습니다.”
# 도원약국에서만 만날 수 있던 ‘잘 짓는 약’
이병섭 약사는 감기·관절염·간장약은 물론, 풍부한 조제 경험으로 약 잘 짓기로 주변에 소문이 났었다. 멀리서도 도원약국에서 약을 지으러 찾아오기도 했다.
“약국이 잘되니까 토요일, 일요일도 계속 문을 열었어요. 지역 단위로 주말에는 당번을 정해서 번갈아가며 약국 문을 연 적이 있었는데, 주말이 더 잘되니까 당번이 아닌데도 약국을 운영하는 약국도 있었어요. 지금은 주말이나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약국을 찾기 어려운 지역도 있지만 그땐 그랬어요.”
이 약사는 밤늦게 약국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자다가도 일어나 약을 지어주곤 했다. 마을사람에게 맞춤 조제를 해주는 것이 도원약국의 자부심이었다.
“요즘엔 만성질환 환자가 많아요. 조제 기간도 길어져 6개월 치 약이 한 번에 나가기도 합니다. 매일같이 찾아오던 이웃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보람이 쌓여갑니다.”
# 미래를 향한 시선, 그리고 삶의 가치
70세, 75세… 언제까지 일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이병섭 약사는 “약사 일은 단순한 생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은퇴하면 아무래도 하루가 무료할 성싶어요. 어쩌면 환자들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 복약지도가 더욱 소중할 겁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도 “정년이 없다는 이 직업의 가치를 잘 새기고, 환자 한사람 한 사람의 삶에 귀를 기울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주변 사람이 하나둘씩 떠나는 게 슬프죠. 그럴수록 인생의 마지막에 지역과 환자에게 남는 것은 결국 따뜻한 기억과 성실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원약국은 단순한 약국의 경계를 넘어 한 세대, 한 지역의 정서와 기억을 품고 있는 곳이다. 시대 변화 속에서도 전문성과 사람 향기가 살아 숨 쉬는 공간, 그곳에서 이병섭 약사는 오늘도 사람들의 온기로 일상을 지켜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