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이야기

90세에도
매일 약국 문을 여는 마음

덕진약국 오명환 약사*

덕진약국의 오명환 약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한 후, 1959년 약사 면허를 취득해 인생의 대부분을 약국에서 보내며 이웃과 함께 성장해왔다. 90세의 지금도 현역 약사로서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 문을 연다. 그의 이야기는 한 지역을 넘어 한 시대의 정성과 신념이 어떻게 오롯이 한 사람의 삶에 깃드는지를 보여준다.

편집실 사진 송인호
영상 김수현

# 선명했던 젊은 날, 새로운 시작

1950년대, 궁핍했던 시절이었지만 오명환 약사는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약학과에 진학한 그는 엄격하고 세밀한 약학 수업을 통해 인체에 대한 경이와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배웠다.

졸업 후 약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하얀 가운을 처음 입던 날, “누군가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겠노라”는 결심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는 관리약사로 첫 근무를 시작해 그곳에서 약사 업무를 익힌 후 서울에서 약국을 열었다.

“결혼하고 남편의 조언에 따라 고양시로 자리를 옮겨 벽제에서 약국을 오래 운영했어요. 그 후로 이 자리에서 약국을 다시 열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 세월만큼 깊어진 사명감

약국을 연 지 어느덧 60여 년이 흘렀지만 오명환 약사의 하루는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된다. 매일 아침 조용히 약국의 불을 켜며 그는 “오늘은 또 어떤 이웃의 고민을 들어주게 될까” 되뇐다. 약국은 단순한 약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아픈 이의 마음 한 조각씩을 치유하는 진료실이자 인생의 굴곡을 품는 쉼터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질병 상담을 할 때도 오 약사는 증상만 듣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에서 병의 실마리를 찾는다. 아픈 어르신과 손을 맞잡고, 새로 이사 온 어린아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생명 지킴이’의 모습이다.

# 전문성과 정성의 세월

이화여대에서 쌓은 탄탄한 학문적 기반 위에, 오명환 약사는 평생 의학의 변화와 신약의 흐름을 꾸준히 공부했다. 최신 의약품, 약물 상호작용, 약용식물학 등도 부지런히 익혔다. 지역 약사회 세미나에서 후배들과 토론하며 늘 “지식과 연민이 동행하는 약사”의 표본이 되고자 했다.

덕진약국의 약장에는 손때 묻은 의약저널, 여러 해에 걸쳐 정리해온 처방기록이 소중히 보관돼있다. 이를 통해 환자에게 약 복용이나 부작용 예방 외에도 식이조절 조언 등 ‘생활 속 건강철학’을 전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 약사는 한 집안의 두세 대를 돌보는 ‘가족 주치약사’가 됐다. 어릴 적 감기약을 지어주었던 아이가 성장해 약사가 되어 찾아온 날, 오 약사는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예전 단골 어르신이 딸을 데려와 “이 선생님이면 안심된다”고 말하던 순간, 노부부가 손을 잡고 미소와 함께 감사를 전하던 순간…. 그 모든 소중한 기억들이 그의 하루를 풍요롭게 만든다.

# 약국 경영은 곧 사람을 돌보는 일

오명환 약사에게 약국은 경영의 공간을 넘어 ‘삶의 교실’이었다. 의료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부터 지역민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여러 위기 상황에서 위로와 전문지식으로 그들을 보호해왔다. “약사의 핵심은 신뢰와 전문성, 그리고 환자를 향한 애정이다”는 신념을 따라, 지금까지 한결같이 장부를 정리하고, 환자의 병력을 기억하고, 상담한 내용을 꼼꼼히 기록한다.

수십 년간 변치 않은 그의 하루엔 무심한 듯 따스한 정성이 묻어난다. 매일 처음 오픈하는 약국 문, “약 드실 때 식사를 꼭 하세요” “이 약은 복용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지켜주세요”라는 당부에 더해 매번 방문하는 환자의 달라진 표정까지 세심하게 살핀다.

오 약사의 약국은 지역사회 내에서 ‘희망의 등불’로 불린다. 이제는 후배 약사들에게 경험을 전하며, 의학적 상담능력과 인간미를 갖춘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 전통 위에 흐르는 변화의 물결

처음 약사의 길을 걷던 순간부터 언제나 세상의 변화에 귀 기울였다. 첫 시작은 미숙하고 불안했지만 ‘환자가 곧 교과서’라는 신념 아래 모든 환자의 이야기를 배우고 익히며 성장했다. 수많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함없는 신뢰와 학습의 지속”이야말로 진정한 전문가의 길임을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덕진약국 오명환 약사의 인생은 배움과 실천, 그리고 성실함이 빚은 한 편의 아름다운 서사시다. 약학과에서의 첫 배움, 지역사회에서 겪은 다양한 인간 군상, 전문지식에 애정이 더해진 상담과 처방, 그리고 90세의 오늘까지도 변치 않는 삶의 태도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오명환 약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약사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약국 문을 열고 닫는 하루하루가, 희망과 신뢰를 전하는 가장 값진 순간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