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약국으로,
기분 좋은 마음으로
기분좋은약국 오정희 약사*
15년간 동네 어르신들의 하루를 지켜온 약사, 그리고 3년간 손주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 할머니. 오정희 약사는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순간에도 ‘약사’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의정부에서의 시간, 잠시 멈췄던 공백기, 그리고 용산에서 다시 시작한 약국. ‘기분좋은약국’이라는 상호처럼 그의 철학은 약보다 먼저 사람을 향한다.
글 편집실 사진 송인호 영상 이성국
3년의 공백 끝에 다시 약국 문을 열었다. 의정부에서 15년 동안 약국을 운영하며 수많은 어르신들과 일상을 함께했던 오정희 약사는, 한때 약사라는 직업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다. 손주가 태어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민할 것도 없었어요. 손주냐 일이냐 하면, 손주였죠.”
아침마다 약국 문을 여는 대신 손주를 돌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3년이 흘러 약국은 멀어졌지만, 약사라는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약사로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일이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더욱 또렷해졌다.
“손주가 조금 크고 나니까 다시 약국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주 자연스럽게 올라오더라고요. 억지로 ‘다시 해야지’가 아니라, 기회처럼 다가왔어요.”
그렇게 그는 다시 약사가 되었다. 이번 무대는 의정부가 아닌 용산, 오피스 빌딩과 병원이 밀집한 젊은 상권이었다. 하지만 의정부에서도, 용산에서도 약국 이름은 한결같다.
‘기분좋은약국’. 42년 넘게 약사로 살아오며 그가 쌓아온 철학이 가장 단순하고도 정확하게 담긴 이름이다. 약국 이름치곤 다소 길지만, 그는 이 이름이 한 음절처럼 마음에 들어온다고 말한다.
“기분이 좋다는 건요, 내 에너지를 좋은 데다 쓸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아이도 어른도, 반려동물도 마찬가지예요. 기분이 좋을 때 더 좋은 선택을 하고, 더 안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약국 역시 다르지 않아요. 제가 먼저 기분 좋은 상태여야 그 에너지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죠.”
의정부에서 배운 것, 사람이 먼저
의정부에서의 15년은 오정희 약사의 약사관을 완성한 시간이었다. 노인 인구가 많던 동네에서 그는 단순히 처방전대로 약을 조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약국은 약을 받으러 오는 곳이자 이야기를 놓고 가는 공간이었다.
“어르신들한테는 제가 딸이나 며느리 같은 존재였어요. 지나가면서 툭 던지는 말들이 오히려 저한테 큰 위로가 됐죠.”
어떤 어르신은 하루 종일 약국에 앉아 있기도 했고, 어떤 이는 말동무가 필요해 들렀다. 관계는 약국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어르신을 위해 노인정 회비를 대신 내고, 하루 한 끼 따뜻한 식사를 챙길 수 있도록 도운 일도 있었다. 교회에서 요청을 받아 어르신 대상 약물 강의를 나간 적도 있다.
“돈으로만 계산하면 손해일 수도 있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일들이 손해로 끝난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우고 받았죠.”
그는 그 세월을 두고 ‘봉사활동과 생업이 동시에 가능했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약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람의 삶에 직접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실감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젊은 환자들, 다시 배우는 약국
용산의 약국은 의정부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주요 고객이 젊은 직장인인 만큼 처방도 간결하고 빠르다. 이렇듯 환경은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의사와의 관계에서는 조언을 앞세우지 않고, 약사로서 어디까지나 복약지도에 집중하는 것. 환자에게 과하지 않게, 그러나 꼭 필요한 지점은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뭔지를 먼저 봐요. 어떤 분은 약보다 위로가 필요한 경우도 있거든요.”
그는 자신의 ‘촉’을 빅데이터라고 부른다. 수많은 환자와의 만남 속에서 축적된 감각은 여전히 약국 운영의 중요한 기준이다.
그가 후배 약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명확하다. ‘전체를 보면 좋겠다.’ 소위 ‘진상손님’도 결국은 단골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한번 기분 좋게 만나면, 다시 돌아온다는 경험을 직접했기 때문이다. 또 약사에게 약국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기에, 그 안에서 자신을 아끼는 것이 곧 경영이라는 점도 잊지 말라고 전한다.
“이 공간에서 내가 가장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또 절약도 좋지만 때론 과감한 투자도 필요해요. 아끼기만 하면 경쟁에서 밀립니다. 투자하면 그만큼 성실해질 수 있고, 그 성실함은 결국 약국의 분위기와 신뢰로 돌아옵니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다시 일하는 기쁨
의정부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시절, 밤 12시에 약국 문을 닫으면서도 건강을 위해 새벽 수영을 다녔다. 그때의 시간들은 삶의 리듬을 바꿨다. 자신에게 투자하면서 웃음과 에너지가 늘어났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없겠더라고요. 손주도 보고, 제일 좋아하는 약사 일도 하면서 요즘이 제일 행복한 시기인 것 같아요.”
지금의 약국은 높은 층고 너머로 하늘이 보이고,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출근길 발걸음에 다시 스프링이 달렸다. 돈을 버는 동시에 봉사도 할 수 있고, 사람들의 삶에 직접 가닿을 수 있는 직업인 약사가 천직이라는 생각도 다시 해본다.
“약이라는 게 참 위대하잖아요. 그걸 관리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시작한 약국, 다시 느끼는 보람. 오정희 약사는 오늘도 ‘기분 좋은 상태’로 약국 문을 연다. 그 기분은 약국을 찾는 사람들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