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포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세포 뱅킹 시대
76세 여성 최 씨는 뇌에 교모세포종이 발병했지만 4년째 생존 중이다.
‘생존 중’이라는 표현은 예상과 달리 살아 있다는 의미다. 교모세포종은 대표적인 악성 뇌암으로,
수술로 떼어내기 힘들뿐더러 공격적인 치료를 해도 5년 생존율이 3% 미만이다 보니 이러한 표현이 생겼다.
최 씨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 전 혈액에서 면역세포 NK세포를 빼서 냉동 보관해뒀다가,
방사선 치료 후에 자기 NK세포를 해동하여 투여받았다. 그 효과 덕인지 암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자라지도 않아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글 김철중 조선일보 의학전문기자
NK세포는 바이러스 감염에 저항하고 암 발생, 증식, 전이를 억제한다. 암세포는 MHC-1이라는 피아식별 표식을 없애는 식으로 면역주력군 T세포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NK세포는 이런 경우에도 암세포를 찾아 공격하며, 면역조절 물질을 분비해 다른 면역세포를 활성화한다. 이에 많은 바이오 회사와 암치료 대학병원들이 NK세포를 증폭 배양하여 환자에게 투여하는 치료법 개발에 나서고 있다. 암 환자 혈액에서 NK세포를 추출하여 냉동 보존했다가, 일반 항암치료 후 해동하고 개수를 증폭하여 환자에게 투여하는 것이다. 현재 국내 대학병원에서 10여 명의 교모세포종 환자를 대상으로 NK면역치료를 하여 생존율을 향상하는 임상 연구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간암이나 난소암 등에도 면역치료를 확대해나가고 있다. 현재 혈액에서 NK세포를 99% 순도로 추출하는 기술을 활용, 환자 가족 중 건강한 구성원의 NK세포를 이용해 면역거부반응 없이 치료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젊고 건강할 때 활동적인 NK세포를 미리 냉동 보존했다가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꺼내 쓸 수도 있다.
젊고 건강할 때 난자와 정액 냉동 보관
요즘 30대 중반 여성들은 난자를 냉동 보관해두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가임력은 35세 이후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이다. 더 나이 들어 아기를 갖고 싶을 때 동결해둔 자기 난자를 꺼내어 인공수정 하면 임신이 가능하다.
실제로 10년 전에 보관했던 난자로 임신 및 출산이 이뤄진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항암치료로 난소 기능을 상실하여 향후 난자 생산이 어려울 젊은 여성 암환자나 외과 수술로 난소를 제거해야 하는 경우 등에도 난자 냉동 뱅킹(banking)이 이용된다.
남성은 정액을 동결 보존할 수 있다.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아기 시술에는 활동성 좋은 신선 정자가 가장 효율적이다. 하지만 잦은 출장 또는 해외 거주 등의 이유로 시술 당일에 정액 채취가 불가능한 경우, 늦은 결혼 또는 직업상 불임 위험에 노출되어 정자 생성 기능의 저하가 우려될 경우, 항암치료 등으로 향후 정자 생성이 어려울 경우 등에 동결 보존을 이용한다.
뱃살 지방 조직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냉동보관했다가 나중에 병에 걸리면 그 줄기세포를 꺼내 병변 부위에 직접 투여하는 줄기세포 뱅킹도 이뤄지고 있다. 또 신생아 탯줄 속에 있는 혈액을 제대혈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혈액 성분을 만드는 조혈모세포와 연골, 뼈, 근육을 형성하는 중간엽 줄기세포 등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제대혈을 냉동 보존했다가, 조혈모세포투여가 필요한 혈액암이나 사고 등으로 조직이 손상됐을 때 꺼내어 활용할 수 있다.
암 치료에 사용하는 동결 면역세포
동결과 해동 기술의 발달 덕분에 모든 세포와 조직은 냉동 저장했다가 나중에 꺼내 쓸 수 있게 되었다. 내 세포를 내가 쓴다는 장점이 있으며 특히 암에 걸렸을 때 면역거부반응 없이 내 면역세포를 보강할 수 있기에 유용하다.
동결 방식은 이렇다. 먼저 혈액을 채취한 다음, 원심분리로 돌려서 면역세포만 골라내고 그 안에서 다시 NK세포와 암세포를 공격하는 단핵구만 추출한다. 암과 전쟁을 치를 특전사만 선별해두는 셈이다.
면역세포를 냉동하면 세포 활성이 정지된 상태에서 수년~십수 년 이상 보관이 가능하다. 암이 발병한 경우, 냉동 보관된 면역세포들을 해동하면 세포 본래의 고유 기능이 활성화된다. 세포수를 늘리기 위해 실험실에서 증식 및 배양하며, 이는 암과 전쟁을 치를 병력 규모를 몇 배~몇십 배 늘리는 효과와 같다. 이렇게 만들어진 면역세포를 수액제에 수집하고 충전한 다음, 환자에게 수액 주사를 놓는 형태로 정기적으로 투여한다. 남는 면역세포는 다시 동결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셀 뱅킹 확대로 획기적 치료법 등장 기대
앞으로 냉동 보관 세포에 면역 특성화된 생체 지표를 붙이는 기술이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몸에 넣는 자기 면역세포의 성능이 업그레이드되어 암이나 난치병 치료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이러한 ‘셀 뱅킹’은 공공영역으로 확대될 전망으로, 유도 만능 줄기세포(iPSC)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다 자란 체세포(피부세포 등)를 특정 유전자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재프로그래밍(역분화)하여 배아 줄기세포처럼 어떤 세포로든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만든 세포를 말한다. 이 세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일본의 야마나카 신야 교토대 교수는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유도 만능 줄기세포 뱅킹은 일본에서 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환자별로 줄기세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면역거부반응이 없는 여러 유전자형의 만능 유도 줄기세포를 미리 보관했다가 필요시 환자에게 투여하는 방식이다. 현재 약 40개 유형의 줄기세포를 미리 만들어두면 아시아인 80%에게 투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후 이러한 줄기세포 공정 라인이 구축되면 파킨슨병, 치매 등 세포를 투여하여 질병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분야에 획기적인 치료법이 등장할 것이다. 바야흐로 새 세포로 헌 병 고치는 시대가 밝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