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를 바꾼 페니실린
그리고 새로운 질문
사소한 상처 하나가 생사를 가르던 시대, 한 왕의 요절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역사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았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 감염은 가장 잔인한 사형선고였고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세균 앞에 쓰러졌다.
버려질 뻔한 실험 접시에서 시작된 페니실린의 발견은 그 운명을 뒤집은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 글은 인류사를 바꾼 항생제의 탄생과 그 이후, 우리가 다시 던져야 할 새로운 질문을 따라간다.
글 구승준 칼럼니스트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1452년, 조선의 왕 문종은 몇 년 동안 반복적으로 앓아온 종기 때문에 사망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1449년 10월 25일, 세종은 당시 세자였던 문종에게 생긴 배저(背疽)라 불리는 종기를 치유하기 위해 신하들을 전국 각지에 보내 기도를 올리게 했고,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죄인들을 사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병세는 잠시 호전되는 듯 보였지만 재발을 거듭했다. 결국 1452년 5월 14일, 문종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오른 지 고작 2년 만이었고, 나이는 겨우 서른여덟이었다.
사소한 상처의 위협
오늘날의 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문종이 앓았던 병은 종기 여러 개가 서로 연결된 집합성 화농 감염, 즉 카벙클(carbuncle)이 림프와 혈관을 따라 퍼지며 패혈증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항생제가 없던 시대에서 이는 사실상 사형선고에 가까웠다.
문종은 단지 요절한 비운의 왕이 아니었다. 그는 제2의 세종, 어쩌면 아버지 세종을 능가할 잠재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세자 시절부터 국정에 깊이 관여했고,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도 세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문과 무를 겸비한 인물로, 특히 과학기술과 군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문종은 화차, 즉 신기전 계열 무기의 개량과 운용에 관여했고, 무기 제작의 표준화와 규정 정비에도 힘을 쏟았다. 군사 체계를 제도적으로 관리하려는 시도였다. 만약 문종이 어린 단종을 남기고 재위 2년 만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킬 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군사력과 행정 체계는 더 안정적으로 구축되었을 것이고, 훗날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전쟁조차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페니실린 주사 몇 대만 있었어도, 조선의 역사는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문종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소한 상처로 죽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또한 항생제가 나오기 이전, 출산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버려질 뻔한 접시에서 시작된
페니실린의 발견
1928년 9월 초, 런던 세인트메리병원 세균학 연구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한 연구자가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배양접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포도상구균을 배양해두었던 접시들 중 하나에서 이상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접시 한쪽에 곰팡이가 자라 있었고, 그 곰팡이를 중심으로 세균이 원을 그리듯 사라져 있었다. 이 연구자의 이름은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다.
이 장면은 훗날 ‘인류 의학사의 전환점’으로 불리게 되지만, 당시로서는 실험 실패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세균 배양접시에 곰팡이가 섞이는 일은 흔했고, 대부분의 연구자는 접시를 그대로 폐기했을 것이다. 플레밍이 다른 연구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 접시를 버리지 않고 들여다봤다는 사실이었다.
플레밍은 이미 감염과 싸우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해 총상 자체보다 감염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을 수없이 보았다. 상처는 치명적이지 않아도, 며칠 뒤 찾아오는 패혈증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음을 의미했다. 당시 사용되던 소독제는 세균뿐 아니라 환자의 조직까지 파괴했다. 그는 ‘살균은 했지만 환자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모순 앞에서 좌절했다.
그러나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했을 뿐, 약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페니실린은 극도로 불안정했고, 정제 과정에서 쉽게 효력을 잃었다. 플레밍은 여러 차례 동물실험을 시도하며 연구를 이어나갔으나, 충분한 농도의 페니실린을 확보하지 못했다. 1929년 발표한 논문은 ‘흥미로운 실험실 현상’ 정도로 취급되었고, 페니실린은 거의 10년 가까이 잊혔다.
역사는 여기서 두 번째 갈림길을 맞았다. 1930년대 말, 옥스퍼드대학의 하워드 플로리와 에른스트 체인이 플레밍의 논문을 다시 읽고 이 물질의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시기, 감염병은 여전히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과 페니실린
2차 세계대전은 페니실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영국과 미국은 이 약의 군사적 가치를 즉각 인식했다. 감염으로 병사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높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 공장을 세웠다. 마침내 새로운 균주와 발효 방식이 개발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페니실린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약이 됐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은 충분한 페니실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전 전쟁과 달리, 감염은 이제 더는 병사의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다. 이는 단순한 의학적 진보가 아니라, 전쟁의 사망 구조 자체가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항생제 시대, 그리고 새로운 질문
전쟁이 끝난 뒤 페니실린은 빠르게 민간 의료로 확산됐다. 폐렴, 성홍열, 매독, 패혈증처럼 한때는 진단 자체가 사망 선고에 가까웠던 질병들이 치료 가능한 질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항생제의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결핵에 효과를 보인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을 시작으로, 테트라사이클린(tetracycline), 세팔로스포린(cephalosporin) 등 새로운 계열의 항생제가 연이어 등장했다. 감염병은 빠르게 후퇴하는 듯 보였고, 인간은 처음으로 세균에 대해 지속적인 우위를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 세균은 사라지지 않았다. 죽지 않았고, 대신 적응했다. 항생제가 강력해질수록 그 압력을 견뎌내는 세균만이 살아남았다.
이 경험은 의학의 사고방식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문제는 항생제가 효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오늘날의 의학은 감염을 전면적으로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정밀하게 개입하고 관리해야 할 위험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항생제는 여전히 필수적이지만, 언제 사용하고 언제 멈출 것인가, 어떤 범위로 적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결국 페니실린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세균을 정복했다는 환상이 아니다. 생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공존을 설계하는 지혜가 의학의 다음 단계임을 깨닫게 했다는 사실이다.